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베르 카뮈 (문단 편집) === 알제리 전쟁 === 그랬던 카뮈가 [[알제리 전쟁]] 당시 [[민족해방전선]](FNL)과 프랑스 정부 가운데 프랑스 정부 편을 든 것은 주변인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다. '이 전쟁은 반란이며 새로운 범[[아랍민족주의]]와 [[사회주의]]가 만나 반프랑스 움직임을 만드는 폭력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'는 프랑스 우익들과 비슷한 주장을 한 것이다. 카뮈는 알제리의 독립은 반대하되 자치권의 확대를 주장했다. '알제리의 독립은 인정할 수 없으나 [[프랑스인]]과 평등하게 살 수 있도록 하자'는 것이다. 카뮈의 옹호론자들은 당시 카뮈의 어머니가 알제리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신변을 염려하여 한 주장이라는 말도 한다. 하지만 카뮈의 제안은 프랑스 측에서 동의할 수 없는 것이었고 알제리도 마찬가지였으니 그는 양쪽에서 까였다. 알제리는 카뮈를 극렬 프랑스 우익으로 여겼으며 공산당 동료들과 알제리 독립을 지지하던 언론인이나 지식인들(특히 [[장폴 사르트르]])은[* 당시 사르트르는 [[소련]]을 방문하는 등 공산주의에 매우 우호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었기에 카뮈와는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. 그나마 옛 문학 동지의 정을 생각해서 프랑시스 장송이라는 제자의 [[서평]]을 사르트르의 잡지인 '현대' 지에 싣는 형식으로 에둘러서 비판했지만 결국 들통났고, 카뮈도 장송이 아닌 '현대지 발행인(사르트르)' 명의 앞으로 반박문을 편지로 써서 맞서다가 결국 죽을 때까지 철천지원수가 되었다. [[https://www.khan.co.kr/article/200207291558301|카뮈 대 사르트르 논쟁 (경향신문)]]] 그를 배신자로 낙인찍고 무시했다. 그래서 알제리가 독립하자 알제리에서 그에 대한 모든 흔적은 철저하게 지워졌다. 이것은 그가 알제리를 고향으로 여겼다지만 정작 [[이방인(소설)|이방인]] 등 그의 여러 작품들 속에서는 프랑스인이 주축이지 알제리인들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점도 한 몫한 듯하다. 현재 그가 살던 집은 일반 가정집이며 1961년에 그를 추모하여 카뮈가 살던 알제리 [[티파사]]에서 만들어진 카뮈 문학기념비는 지금까지도 60년 넘게 용케 남아 있지만 카뮈의 이름은 끌로 지워진 채 방치되어 보존 상태가 엉망이었다. [[http://thumbnail.egloos.net/592x0/http://pds20.egloos.com/pds/202108/09/22/e0006522_6110e5799017c.jpg|기념비 맨 밑에 끌로 깎여져 지워진 게 알베르 카뮈 이름.]] 2000년대 중순, [[고려대학교]] 교수이자 역자 ‘김화영’은 알제리에 가서 보았을 때 기념비는 40년 넘도록 관리되지 않았으며 현지인들이 마구 험하게 다루는지 금이 가고 깨지고, 기념비 글귀도 흐릿해질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다. 그래도, 2019년에 알제리에서 본 이들이 찍은 사진을 봐도 아직은 글도 다 알아볼 수 있고 상태는 나쁘지 않다. [[https://m.blog.naver.com/jrkimceo/221220359449|2018년에 찍은 카뮈 기념비]]. 이젠 프랑스인이나 알제리인들은 카뮈가 누군지 모르는 경우가 많으며 알더라도 혐오감을 가지고 이름조차 잘 언급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. 프랑스에서 카뮈 기념비를 보관한다고 하면 응할지 모르겠지만, 이젠 프랑스도 잊어버렸는지 그런 제의도 없었다. 심지어 알제리 문학인사들이 문학적 재능과 그 공로를 인정해 프랑스에게 카뮈 기념비를 가져가 보관하라고 먼저 제의했음에도 수십여 년 동안 답변조차 없었다고 하니 프랑스에서도 잊어버린 듯하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